맨위로가기

앙리 3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앙리 3세는 1551년에 태어나 1589년 암살된 프랑스 왕으로, 157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를 통치했다. 그는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아들로, 앙주 공작, 폴란드 국왕을 거쳐 프랑스 왕이 되었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종교적 갈등과 궁정 내 권력 다툼에 시달렸으며, 동성애적 성향과 사치스러운 생활로 비판을 받았다. 앙리 3세는 기즈 공작 암살, 나바라의 앙리와의 동맹 등을 거치며 세 앙리의 전쟁을 겪었고, 결국 자크 클레망에게 암살당하며 발루아 왕조는 막을 내렸다. 그는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 그의 성적 지향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앙리 3세 - 헨리크 조항
    헨리크 조항은 1573년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이 왕권 견제를 위해 제정한 문서로, 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귀족의 권리를 보장하며 국왕 선출 방식, 원로원의 역할, 종교적 자유 등을 규정했다.
  • 앙리 3세 - 블루아성
    블루아성은 프랑스 블루아에 위치한 역사적인 성으로, 9세기부터 17세기까지 다양한 건축 양식을 보여주며 프랑스 왕실의 주요 거주지이자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했고, 1840년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어 복원되어 현재는 박물관으로 운영된다.
  • 퐁텐블로 출신 - 가스통 도를레앙 공작
    가스통 도를레앙 공작은 프랑스 왕족으로, 형 루이 13세 치세에 반란과 음모를 일으키며 불안정한 행보를 보였고, 루이 13세 사후에는 프롱드의 난에 가담했으며, 두 번의 결혼으로 자녀를 두었고 조카 루이 14세 치세에는 '르 그랑 몽시외'로 불렸다.
  • 퐁텐블로 출신 - 스페인 왕비 프랑스의 엘리자베트
    스페인 왕비 프랑스의 엘리자베트는 프랑스 앙리 4세의 딸로 펠리페 4세와 결혼하여 스페인 왕비가 되었으며, 프랑스와 스페인의 동맹 강화에 기여하고 카탈루냐 반란 시기에는 섭정을 맡기도 했다.
앙리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검은 베레모를 쓴 앙리의 초상화
에티엔 뒤몽스티에의 초상화, 1580-86년경
이름프랑스어: (앙리 3세, 알렉상드르 에두아르 출생)
폴란드어: (헨리크 발레지)
리투아니아어: (헨리카스 발루아)
출생명알렉상드르 에두아르, 앙굴렘 공작
출생일1551년 9월 19일
출생지퐁텐블로 성, 프랑스
사망일1589년 8월 2일 (37세)
사망지생클루 성, 프랑스
사망 원인암살
매장지생드니 대성당, 프랑스
종교가톨릭교
서명
통치 정보
프랑스 국왕style: text-align:center; vertical-align:middle;
즉위1574년 5월 30일
대관식1575년 2월 13일, 랭스 대성당
이전 국왕샤를 9세
이후 국왕앙리 4세
폴란드 국왕style: text-align:center; vertical-align:middle;
리투아니아 대공style: text-align:center; vertical-align:middle;
즉위 (폴란드-리투아니아)1573년 5월 16일
퇴위 (폴란드-리투아니아)1575년 5월 12일
대관식 (폴란드)1574년 2월 22일, 바벨 대성당
이전 국왕 (폴란드-리투아니아)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이후 국왕 (폴란드-리투아니아)안나와 스테판
섭정 (폴란드)야쿠프 우한스키
가문
왕가발루아-앙굴렘 가문
아버지앙리 2세
어머니카트린 드 메디치
배우자
배우자(1575년 결혼)

2. 어린 시절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치의 셋째 아들로 퐁텐블로 성에서 태어났다. 어릴적 이름은 알렉상드르 에두아르였으나 1559년에 앙리로 개명하였다.[20] 어머니 카트린의 총애를 받고 자랐으며, 형제들과 달리 발루아 가문의 전통인 사냥과 운동보다는 예술과 독서를 즐기는 등 이탈리아적인 취향을 선호했다.

어린 시절 앙리는 반항의 수단으로 개신교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아홉 살 때 자신을 "어린 위그노"라고 칭하며, 누이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에게 개신교 시편을 불러주거나 사도 바오로 조각상의 코를 물어뜯는 등의 행동을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경고 이후 가톨릭 신앙을 유지했다.

1560년에는 앙굴렘 공작과 오를레앙 공작이 되었으며, 1566년에는 앙주 공작이 되었다. 병약했던 둘째 형 샤를 9세는 건강한 앙리를 질투하고 혐오했다.

3. 제4차 위그노 전쟁

1568년 위그노 전쟁 당시 형인 샤를 9세의 집권기에 왕실 군대의 지휘관이 되어 1569년 3월 자르나크 전투에서 루이 드 부르봉 공작이 이끄는 위그노 군대를 격파했고, 같은 해 10월 몽콩투르 전투에서 가스파르 드 콜리니의 군대를 격파해 군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보여주었다.[8] 그 과정에서 위그노 지도자였던 루이 드 부르봉 공작을 살해하여 위그노들의 증오를 샀다.[21] 1570년, 스페인을 견제하고자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약혼이 오갔으나 백년 전쟁 이후 양국 간의 감정이 좋지 않아 무산되었다.

4.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야기에우워 왕조가 단절되자, 1572년 7월 7일 세임(폴란드 의회)에서 새 국왕을 선출하기로 결정되었다.[9] 앙리는 국왕 후보 중 한 명이었으며, 에르네스트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 스웨덴 국왕 요한 3세, 러시아 차르 이반 4세 등이 경쟁 후보였다.[9] 1572년 8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이후, 관용적인 종교 체제를 구축하려던 폴란드의 슈라흐타(귀족 계급) 사이에서는 프랑스인 후보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었다.[9] 그러나 프랑스 사절 장 드 몽뤼의 노력과 지그문트 2세의 여동생 안나의 지지로, 1573년 5월 9일 세임은 앙리를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했다.[9]

앙리 3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의회와 귀족 앞에서 폴란드 왕위에 앉아 있으며, 창검병에게 둘러싸여 있다, 1574


세임은 앙리에게 왕권 제한 조항과 통치 계약인 "팍타 콩벤타"의 승인을 요구했고, 앙리는 이에 서명했다.[13] 앙리에게 제시된 왕권 제한 조항은 이후 폴란드 선거 국왕의 즉위 시 필수 승인 규칙이 되었고, 이를 처음 승인한 앙리의 이름을 따 "헨리크 조항"이라 불리게 되었다.[13]

앙리는 폴란드의 첫 국왕 자유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귀족의 권력이 강하고 왕권이 약한 폴란드의 정치 문화에 위화감을 느꼈다.[13] 또한 형 샤를 9세결핵 악화로 프랑스 왕위 계승자인 앙리는 출국을 망설였으나, 폴란드 사절단의 권유로 1574년 1월 폴란드에 도착했다.[13] 그러나 1574년 2월 대관식 때 열린 세임에서 앙리는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얻어 종교 관용 체제를 인정하는 통치 계약을 무시하려 해 반감을 샀다.[13]

앙리는 폴란드 귀족 내 복잡한 파벌 관계에 익숙하지 않았고, 귀족들은 새 국왕의 관직 임명이 파벌 간 세력 균형을 잃었다고 불만을 가졌다.[13] 사무엘 즈보로프스키라는 귀족이 국왕 앞에서 칼부림 사건을 일으켰지만, 앙리가 즈보로프스키의 사형을 주저하여 우유부단하다는 비난을 받았다.[13] 라틴어를 거의 못하는 국왕이 폴란드 귀족에게 다가가지 않고 프랑스인 측근과만 어울리는 것도 문제였다.[13] 앙리는 28살 연상의 안나 여왕과의 혼담에도 소극적이었다.

1574년 5월 30일, 프랑스에서 샤를 9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6월 14일 크라쿠프에 도착했다.[24] 앙리는 6월 18일 새벽, 측근 몇 명을 데리고 왕궁을 탈출했다.[24] 폴란드 귀족들은 국왕의 도망에 경악했지만, 프랑스인 국왕의 실망스러운 행동에 속이 후련하다고 생각하는 귀족도 있었다.[24] 슈라흐타는 앙리에게 폴란드 귀국을 요구하며 1575년 5월 12일을 귀국 기한으로 정했다.[24] 앙리가 기한 내에 돌아오지 않자 왕위는 실효되었지만, 앙리는 죽을 때까지 폴란드 국왕 칭호를 사용했다.

5. 프랑스 국왕

앙리 3세는 프랑스 왕위에 오른 후, 즉위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며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그는 지적이고 세련된 궁정인이었으나, 왕위에 오르면서 '미뇽'이라 불린 총신들을 지나치게 총애하고, 동성애적인 성적 취향과 사치 등으로 비난을 받았다. 또한 어머니인 카트린 드 메디치와 함께 사악하고 간사한 인물로 인식되어, 많은 이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프랑스를 혼란에 빠뜨렸다.[8]

귀국 후 앙리 3세는 왕모 카트린과 함께 어려운 국정을 이끌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격렬한 대립 속에서, 궁정 내 복잡한 권력 관계는 새로운 갈등을 야기했다. 카트린에게 경시되던 왕제 앙주 공 에르퀼 프랑수아가 남쪽의 프로테스탄트와 손을 잡고 일시적으로 국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곤경에 처한 앙리 3세는 1576년 볼리외 칙령으로 파리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프로테스탄트의 공적 예배를 허용했다. 그러나 과격파 가톨릭 귀족들이 가톨릭 동맹을 결성하여 칙령을 폐지시켰다. 나바라 왕 앙리를 맹주로 하는 프로테스탄트가 봉기했지만(제6차 위그노 전쟁), 가톨릭 측의 동조가 없어 1577년 베르주라크 화약에서 위그노 측에 대한 종교적 관용은 크게 제한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일부 급진파 프로테스탄트가 콩데 공작앙리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지만(제7차 위그노 전쟁) 실패했고, 왕국에는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왔다.[8]

1584년, 왕제 앙주 공이 사망하면서 살리카 법에 따라 나바라 왕 앙리가 수석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이는 반 프로테스탄트 감정을 고조시켰고, 기즈 공 앙리가 이끄는 가톨릭 동맹이 1585년 3월 북프랑스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며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제8차 위그노 전쟁 / 세 앙리의 전쟁). 앙리 3세는 가톨릭 동맹의 맹주가 되어 나바라 왕의 왕위 계승 자격을 박탈하고 프로테스탄트에게 개종을 강요하는 7월 칙령을 발표했다. 프로테스탄트 측은 나바라 왕을 지도자로 하여 잉글랜드, 덴마크 등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의 지원을 확보했다. 온건 가톨릭 신자들은 갈리카니즘 전통을 무시하는 가톨릭 동맹의 로마 교황과의 결속을 위험하게 여겼다.[5]

5. 1. 위그노 전쟁

앙리 3세는 동생 에르퀼 프랑수아가 자신의 지지자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앙리 드 부르봉 또한 파리에서 탈출해 살아남은 위그노들을 규합하면서 위그노들의 반란이 재발하여 어려움을 겪었다.[8] 팔츠 선제후였던 요한 카시미르까지 위그노들을 돕기 위해 40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프랑스 영내로 들어왔다.

1576년 블루아에서 소집된 삼부회에서 앙리 3세에게 원조금을 내놓기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1577년 베르주라크 평화조약을 체결해 위그노는 몇 가지 자유권을 박탈당했고 가톨릭 측은 신성동맹을 해체해야 했다.[8]

1568년 위그노 전쟁 당시 앙리는 왕실군대의 지휘관이 되어 1569년 3월에 자르나크 전투에서 루이 드 부르봉 공작의 군대를, 같은 해 10월 몽콩투르 전투에서 가스파르 드 콜리니의 군대를 격파해 군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보여주었다.[8]

5. 2. 세 앙리의 전쟁

1584년 2월, 네덜란드의 오라녜 공작 빌럼 1세에게 네덜란드 군주로 추대받았다가 앙트베르펜의 참변으로 많은 병력을 잃고 실의에 빠져 파리로 돌아온 앙리 3세의 동생 프랑수아가 사망하면서 프랑스 왕위 계승 과정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5] 앙리 3세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은 개신교 신자였던 매부 나바라의 국왕 앙리에게 넘어갔다. 국내외 가톨릭 세력은 이에 반발하여 신성동맹을 다시 일으켰고, 앙리의 숙부이자 가톨릭 신자인 샤를 드 부르봉을 환속시켜 앙리 3세의 후계자로 내세웠다.[5]

1585년 7월 18일, 앙리 3세는 신성동맹과 손을 잡아 왕권을 강화하려던 모후 카트린 드 메디치의 설득으로 위그노의 자유권을 폐기하는 느무르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조약 선포 후 군중들의 환호에 답하지 않고 떠나 가톨릭 교도들의 경멸을 받았고, 종교의 자유를 박탈당한 위그노와 독일의 개신교 제후들로부터도 경고를 받았다.[5]

결국 프랑스 전역은 다시 한번 내전으로 치달았고, 이 전쟁이 바로 '세 앙리의 전쟁'이다. 앙리 3세는 전쟁 중에도 사치에 몰두했고, 쿠트라 전투에서는 총신인 국왕군 총지휘관 조아이유즈 공작을 비롯한 국왕군 8,000명이 궤멸당하는 등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또한 프랑스 왕위를 노리던 앙리 드 기즈의 공작으로 파리에서 국왕의 위신이 실추되기 시작했다.[5] 1588년 5월 12일, 파리에서 앙리 드 기즈의 농간으로 보이는 시민 봉기가 일어나자, 앙리 3세는 모후 카트린이 앙리 드 기즈와 협상하는 동안 측근들을 데리고 파리를 탈출하여 샤르트르로 피신했다.[5]

5. 3. 앙리 드 기즈 암살

1588년 5월, 앙리 3세는 기즈 공작 앙리 1세의 야심을 눈치채고 그의 파리 입성을 금지했다. 그러나 파리 시민들은 국왕에 대항하여 봉기했고, 앙리 3세는 신변의 위험을 느껴 샤르트르로 피신했다.[25]

그해 여름 스페인 무적함대의 패배 이후, 앙리 3세는 가톨릭 동맹에 대한 스페인의 지원에 대한 두려움이 약해진 것으로 보인다. 가톨릭 동맹은 기즈 공작 앙리 1세의 주도 하에 블루아에서 삼부회를 소집하여 왕권 제한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에 앙리 3세는 1588년 10월 16일 블루아에서 삼부회를 개최하면서 기즈 공작 앙리 1세와 그의 동생인 로렌의 추기경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1588년 12월 23일, 앙리 3세는 자신의 방으로 앙리 드 기즈를 불러들여 살해하고, 그의 동생인 루이 또한 살해하는 암살 계획을 실행했다. 그리고 신성동맹이 내세운 자신의 또 다른 후계자인 샤를 드 부르봉을 포함한 기즈 가문의 측근들을 체포했다.[25]

기즈 공작 앙리 1세는 프랑스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고, 시민들은 이 사건에 대해 앙리 3세에게 등을 돌렸다.[25] 1589년 1월 5일, 그의 정치적 충고자이자 후원자였던 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사망하면서, 앙리 3세는 마옌 공작을 비롯한 신성동맹에 의해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25]

5. 4. 나바라의 앙리와의 제휴

1589년 4월 3일, 앙리 3세와 나바라의 앙리는 1년 기한의 공식적인 조약을 체결했고, 같은 해 4월 29일에 각자 조약을 발표했다. 5월 8일, 신성동맹군이 투르를 공격했으나, 앙리 드 나바라가 이끄는 위그노 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후 앙리 3세는 나바라의 앙리와 함께 파리를 탈환하기 위해 두 달 동안 준비했다. 같은 해 7월 말, 4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리 성벽에 도달한 후 파리 서쪽 생-클루에 위치한 레츠 백작의 저택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1588년 여름 스페인 무적함대의 패배로 가톨릭 동맹에 대한 스페인의 지원에 대한 두려움이 약해지자, 앙리 3세는 1588년 12월 23일 블루아 성에서 기즈 공작을 의회 회의실로 초대했고, 그곳에서 공작의 형제인 기즈 추기경 루이 2세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공작은 국왕이 왕실 침실 옆의 개인실에서 그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곳에서 왕실 경비병들이 공작과 추기경을 살해했다. 프랑스 왕위 경쟁자가 자신에게 대항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국왕은 기즈 공작 샤를을 투옥했다. 기즈 공작은 프랑스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고, 시민들은 살인에 대해 앙리 3세에게 등을 돌렸다. 의회는 국왕을 상대로 형사 고발을 제기했고, 앙리 3세는 프로테스탄트인 자신의 상속자 나바르의 앙리와 힘을 합쳐 투르 의회를 설립해야 했다.[15]

6. 최후와 사후

1589년 8월 1일, 앙리 3세는 파리 포위전 중에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사 자크 클레망을 만났다. 클레망은 편지를 전달하는 척하며 앙리 3세의 복부를 단검으로 찔렀다. 앙리 3세는 클레망을 밀쳐내고 경비병을 불러 그를 죽였으나, 이미 심한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1] 병상에 누운 앙리 3세는 자신의 후계자인 나바라의 앙리에게 가톨릭으로 다시 개종할 것을 권하고, 그에게 충성할 것을 사람들에게 명했다.[1] 앙리 3세는 다음날 오전 2시에 숨을 거두었고, 이로써 발루아 왕조는 막을 내렸다.[1]

이후 앙리 4세로 즉위한 나바라의 앙리는 앙리 3세를 생드니 대성당에 안장했다.[1] 그러나 프랑스 혁명 당시, 앙리 3세의 묘는 파헤쳐지고 시신은 모욕을 당한 후 공동묘지에 버려지는 수모를 겪었다.[1]

앙리 3세의 죽음으로 발루아 왕가는 단절되었고, 부르봉 왕가의 앙리 4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했다.

7. 성적 지향과 논란

앙리 3세는 '미뇽'이라 불린 총신들을 총애했고, 여성스러운 취향 때문에 오랫동안 동성애자 또는 양성애자로 여겨졌다.[22]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앙리 3세에게 많은 여성 정부가 있었고, 남성 성 파트너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한다.[23] 앙리 3세의 동성애 이미지는 그의 정치적 반대자들에 의해 조장된 측면이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8. 대중문화 속 앙리 3세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과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 ''여왕 마고''(1954), ''여왕 마고''(1994)에서 앙리 3세는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1994년 영화에서 앙리 3세는 파스칼 그레고리가 연기했는데, 양성애자이며 여동생에게 성적 관심을 보이는 다소 사악한 인물로 묘사된다.[10] 소설에서는 앙리가 동성애자로 묘사되지 않았지만, 1954년 영화에서는 여성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왕으로 묘사되었다.

영화 ''엘리자베스''(1998)에서는 앙리 3세(앙주 공작 시절)가 엘리자베스 1세에게 구애하는 모습이 허구적으로 묘사된다. 뱅상 카셀이 연기한 앙주 공작은 우스꽝스러운 어릿광대이자 성전환자로 그려진다. 실제 역사에서 둘은 만난 적이 없으며, 엘리자베스 1세는 10년 후 앙리 3세의 동생인 프랑수아, 앙주 공작에게 구애를 받았다.[11]

샤브리에의 오페라 코미크 ''그를 원치 않았던 왕''(1887)은 앙리가 폴란드의 왕이 되기를 꺼리는 불행한 폴란드 에피소드를 다룬다. 앙리는 크라쿠프에서 폴란드 귀족들과 공모하여 스스로를 폐위시키려 하지만, 결국 음모는 실패하고 앙리가 왕관을 쓰는 장면으로 막이 내려진다.[13]

참조

[1] 서적 Homosexuality and Civilizatio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3
[2] 서적 La Cour de France Fayard 1987
[3] 서적 Un régicide au nom de Dieu, l'assassinat d'Henri III Gallimard 2006
[4] 서적 La cour de Henri III Ouest-France 1986
[5] 서적 Erotika Biblion https://archive.org/[...] Bruxelles, Chez tous les libraires 1783
[6] 서적 Queer (Re)Readings in the French Renaissance: Homosexuality, Gender, Culture https://books.google[...] Ashgate 2008
[7] 학술지 Love, Sodomy, and Scandal: Controlling the Sexual Reputation of Henry III 2003
[8] 서적 The French Wars of Religion 1562–1628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9] 서적 Theodore Beza and the quest for peace in France, 1572–1598 https://books.google[...] BRILL 2000
[10] 서적 Elective monarchy in Transylvania and Poland-Lithuania, 1569-1587 https://www.worldcat[...]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11] 서적 Governing passions: peace and reform in the French kingdom, 1576–1585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12] 서적 Rzeczpospolita Obojga Narodów (The Commonwealth of the Both Nations) https://books.google[...] 1982
[13] 서적 Poczet polskich królowych, księżnych i metres https://books.google[...] 1990
[14] 웹사이트 Kuracja wiedzą https://web.archive.[...] 2009-01-05
[15] 서적 The Historical Atlas of the Jewish People Hutchinson
[16] 서적 Cervantes in Algiers: a captive's tale https://books.google[...] Vanderbilt University Press 2005
[17] 웹사이트 King of France from 1574 to 1589 https://web.archive.[...] Parliament of Canada 2012-12-14
[18] 서적 Whale
[19] 서적 Tomas
[20] 서적 ラルース図説 世界史人物百科〈2〉
[21] 서적 Catherine de Medici
[22] 웹사이트 Henri III http://www.ac-strasb[...]
[23] 웹사이트 Henri III était homosexuel - Tatoufaux.com http://www.tatoufaux[...]
[24] 문서 개신교 세력권이었던 팔츠 궁중백령의 중심지였던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하자 환영인파가 보이지도 않았고 하이델베르크 내에 있는 프리드리히 3세의 궁정에서 식사를 할 때 식당 벽엔 대학살 당시 살해되었던 콜리니 제독의 초상화가 걸려져 있었고 초대된 다른 손님들 또한 대학살 당시 가톨릭의 개신교 탄압 때문에 프랑스를 탈출한 위그노들이니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해야할 정도였다.
[25] 문서 공교롭게도 앙리 드 기즈의 측근들은 암살 계획을 알았는지 동생 루이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암살 전날까지 경고를 했으나 그는 어쩐일인지 그 경고들을 무시했다고 한다.
[26] 문서 총신인 니콜라 드 랑부일레로부터 나바라 국왕 앙리의 측근인 로스니 남작 막시밀리애 드 베튄이 블루아 근처를 지나가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그를 불려 나바라의 앙리와 다시 제휴하기 원하고 로스니 남작이 중재해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